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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1

임진왜란5 수군의 활약 왜란 직전에 조선이 소유한 판옥선(板屋船: 戰艦) 수는 모두 250여 척으로 추측된다. 이때 경상·전라 양도의 수군 진용은 경상좌수사에 박홍, 경상우수사에 원균(元均), 전라좌수사에 이순신, 전라우수사에 이억기(李億祺)였다. 그러나 난이 발발하자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대는 전멸하다시피 하였다. 또한 경상좌수사 박홍은 전세가 불리하자 전선과 전구(戰具)를 모두 침몰시켜 수군도 흩어지고 단지 4척의 전선만이 남게 되었다. 이런 실정이라 조선의 수군은 전라좌·우수사 휘하의 수군과 전선이 주축이 되었고 그 지휘는 이순신이 담당하게 되었다. 이순신의 제1차 출동에는 원균도 가세했으나 이순신 단독에 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1592년 5월 4일에서 8일에 걸쳐 벌어진 이 해전에서 이순신 함대는 옥포(玉浦.. 2018. 11. 30.
임진왜란4 의병의 활동 의병이 일어나게 된 동기는, 한마디로 관군의 무능으로 인하여 국토가 일본군에 의하여 짓밟히고 많은 생령(生靈)이 죄없이 쓰러져가자, 동족을 구하고 스스로 향리를 수호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자의에서 나온 것이었다. 의병은 신분적으로 보면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있어, 의병 활동을 벌이는 기간에는 계급이나 신분의 차이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병장은 대개가 전직 관원으로 문반 출신(文班出身)이 압도적으로 많고 무인들은 소수였다. 그리고 덕망이 있어 지방에서 추앙을 받는 유생들도 있었다. 의병을 일으키는 데 적합지로는 자기가 자란 고장이나 지방관으로 있을 당시 선정을 베풀어 그곳 지방민들이 잘 따를 수 있는 곳을 택하였다. 나아가 이를 .. 2018. 11. 30.
임진왜란3 전쟁의 발발 도요토미는 조선과의 교섭이 결렬되자 바로 원정군을 편성하여 조선을 침공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나고야[名護屋]에서 제군(諸軍)을 지휘할 계획을 세웠으며, 대군을 9번대(番隊)로 나누어 침략을 개시하였다. 이때 각 대를 지휘한 주장(主將)과 병력은 다음과 같다. 제1번대는 주장 고니시로 병력 1만 8700명이며, 제2번대는 주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로 병력 2만 2800명, 제3번대는 주장 구로다[黑田長政]로 병력 1만 1000명, 제4번대는 주장 모리[毛利吉成]·시마즈[島津義弘]로 병력 1만 4000명, 제5번대는 주장 후쿠시마[福島正則]로 병력 2만 5000명, 제6번대는 주장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로 병력 1만 5000명, 제7번대는 주장 모리[毛利元之]로 병력 3만명, 제8번대.. 2018. 11. 30.
임진왜란2 그런데 곧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모든 것이 이에 집중되어 사행을 선정하지 못하다가 11월 중순이 넘어서야 통신사 일행을 선정하였다. 즉 정사에 황윤길(黃允吉), 부사에 김성일(金誠一), 서장관에 허성(許筬)으로 결정되었다. 통신사 일행은 이듬해인 1590년 3월에 겐소 일행과 함께 서울을 출발하여 대마도에서 한달간 머무르다가 7월 22일에 경도(京都)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일행은 도요토미가 동북 지방을 경략중이어서 바로 만나지 못하고 11월에 가서야 접견하여 국서(國書)를 전하게 되었다. 통신사 일행이 돌아오려 하는데도 도요토미는 답서를 주지 않아 국서를 전한 지 4일 만에 경도를 떠나 사카이[堺] 포구(浦口)에 와서 답서 오기를 기다리다가 보름 만에 받았다. 그런데 내용이 오만불손하여.. 2018. 11. 30.
임진왜란1 정의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서 우리나라에 침입한 일본과의 싸움. 개설 1차 침입이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이라 부르며, 2차 침입이 정유년에 있었으므로 ‘정유재란’이라 한다. 하지만 임진왜란 하면 일반적으로 정유재란까지 포함시켜 말한다. 이 왜란을 일본에서는 ‘분로쿠[文祿]·케이초[慶長]의 역(役)’이라 하고, 중국에서는 ‘만력(萬曆)의 역(役)’으로 부른다. 배경 조선이 임진왜란을 당하여 전쟁 초기 이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국력이 쇠약해진 것은 왜란이 일어난 선조대에 이르러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훨씬 이전부터 중쇠(中衰)의 기운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연산군 이후 명종대에 이르는 4대 사화(四大士禍)와 훈구(勳舊)·사림(士林) 세력간에 계.. 2018. 11. 30.
이순신4 1598년 11월 19일 노량에서 퇴각하기 위하여 집결한 500척의 적선을 발견하고, 싸움을 기피하려는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陳璘)을 설득하여 공격에 나섰다. 함대를 이끌고 물러가는 적선을 향하여 맹공을 가하였고, 이것을 감당할 수 없었던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와 선척을 잃었다. 그러나 선두(船頭)에 나서서 적군을 지휘하다가 애통하게도 적의 유탄에 맞았다. 죽는 순간까지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 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운명을 지켜보던 아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그대로 통곡하려 하였으나, 이문욱(李文彧)이 곁에서 곡을 그치게 하고 옷으로 시신을 가려 보이지 않게 한 다음, 북을 치며 앞으로 나아가 싸울 것을 재촉하였다. 군사들은 통제사가 죽은 사실을 미처 모른 채 기운을 .. 2018. 11. 30.
이순신3 1597년 명·일 사이의 강화회담이 결렬되자, 본국으로 건너갔던 왜군이 다시 침입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이순신은 적을 격멸할 기회가 다시 왔음을 기뻐하고 싸움에 만전을 기하였다. 그러나 원균의 모함과 왜군의 모략으로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고니시[小西行長]의 부하이며 이중간첩인 요시라(要時羅)라는 자가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에게 가토[加藤淸正]가 어느날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이를 사로잡을 것을 은밀히 알려오자, 조정에서는 통제사 이순신에게 이를 실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순신은 이것이 적의 흉계인 줄 알면서도 부득이 출동하였으나, 가토는 이미 수일 전에 서생포(西生浦)에 들어온 뒤였다. 이때 마침 조정에서도 영의정 유성룡을 몰아내려는 자들이 있었다. 이순신은 유성룡이 전라.. 2018. 11. 30.
이순신2 5월 29일 거북선을 앞세우고 23척의 전선으로 여수항을 출항하였다. 노량(露梁) 앞바다에 이르러 전선 3척을 인솔하고 있던 원균이 이순신의 전함에 올라와 적정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조선수군은 곧 일본수군이 정박중인 사천으로 달려갔다. 이때 왜군은 대부분 상륙하여 있었고 해변에는 왜선 12척이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공격이 용이하지 않자 그들을 바다로 유인하여 섬멸할 계획을 세웠으며, 그 작전계획은 적중하여 왜선 12척을 파괴하고 많은 왜군을 섬멸하였다. 이 싸움에서 군관(軍官) 나대용(羅大用) 등이 부상하였고, 이순신도 적의 조총탄에 맞아 왼쪽어깨가 뚫리는 부상을 입었다. 이 싸움에서 최초로 출동한 거북선의 위력은 확고한 인정을 받았다. 6월 2일 왜선이 당포(唐浦)에 정박중이라는 보고를 받.. 2018. 11.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