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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순신2

by 박카스1 2018.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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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9일 거북선을 앞세우고 23척의 전선으로 여수항을 출항하였다. 노량() 앞바다에 이르러 전선 3척을 인솔하고 있던 원균이 이순신의 전함에 올라와 적정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조선수군은 곧 일본수군이 정박중인 사천으로 달려갔다. 이때 왜군은 대부분 상륙하여 있었고 해변에는 왜선 12척이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공격이 용이하지 않자 그들을 바다로 유인하여 섬멸할 계획을 세웠으며, 그 작전계획은 적중하여 왜선 12척을 파괴하고 많은 왜군을 섬멸하였다.

이 싸움에서 군관() 나대용() 등이 부상하였고, 이순신도 적의 조총탄에 맞아 왼쪽어깨가 뚫리는 부상을 입었다. 이 싸움에서 최초로 출동한 거북선의 위력은 확고한 인정을 받았다. 6월 2일 왜선이 당포()에 정박중이라는 보고를 받고 곧 그곳으로 달려갔다.

당포 선창에는 일본수군장 가메이[]와 구루시마[]가 인솔하는 대선 9척, 중·소선 12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일본수군들은 성 안팎에서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다 조선수군을 보고 발포하였으나, 거북선을 앞세운 조선수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대패하고 왜장 구루시마가 전사하였다.

당포해전 다음날 이순신의 함대는 가박지()인 창신도()를 떠났다. 다음날 당포 앞바다에서 왜선이 거제로 향하였다는 정보를 받고, 즉시 전함대에 거제 출격을 명하고 발선()하려는 때에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전선 25척을 이끌고 이곳에 오자 매우 반갑게 맞았다.

5일 아침 전선 51척과 중·소선 수십척의 연합함대는 일제히 거제로 향하였다. 이때 피난민으로부터 거제로 도피하였던 왜선단이 다시 당항포로 도주하였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이순신과 이억기와의 연합함대는 바로 길을 바꾸어 당항포로 향하였다. 당항포 내만()에는 왜의 대선 9척, 중선 4척, 소선 13척이 정박 중이었다.

조선수군의 내습을 발견한 일본수군은 먼저 공격을 가해 왔다. 아군의 전선들은 적선을 포위하고 먼저 거북선을 돌입시켜 맹공을 가하였다. 이 싸움에서 왜군은 대패하였고 왜선은 모두 소실되었다.

이와 같이 이순신은 해전에서의 연전연승으로 자헌대부()에 승계()되었다. 그 뒤 다시 선제공격으로 거제·가덕에 출몰하는 일본수군을 격멸하기 위하여 우수사 이억기에게 작전을 전달하고 연합함대의 조직을 통첩하고, 7월 6일 전라좌·우수군이 일제히 출동한 뒤 노량해상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전선 7척과도 합세하였다.

이때 일본군은 해전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하여 병력을 증강하여 견내량()에는 적장 와키사카[] 등이 인솔한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견내량이 지형이 좁고 활동이 불편하다는 판단 아래 장소를 한산도로 물색하였다.

약간의 판옥선()으로 일본의 수군을 공격하면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을 쳐, 일제히 총통()을 발사하는 등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층각선() 7척, 대선 28척, 중선 17척, 소선 7척을 격파하였다.

이 싸움에서 와키사카의 가신() 와키사카사베에[]·와타나베[]를 위시하여 이름 있는 자들이 전사하였다. 이순신은 이 한산대첩의 공으로 정헌대부()에 승계되었다.

한산대첩 후 이순신은 다시 전진하여 안골포(: 창원군 웅천면)의 적선을 격파하였다. 와키사카와 합동작전을 하려던 구키[]·가토[] 등의 일본수군장은 와키사카의 수군이 전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안골포에 정박 중이었다.

이순신은 수심이 얕아서 적선을 유인하여 공격하려 하였으나 적선이 포구 밖으로 나오지 않자,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교대로 종일토록 적선을 공격하여 대선을 거의 분멸()하였다.

제3차 출동의 결과로 가덕도 서쪽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왜침의 교두보인 부산포공격의 결단을 내렸다. 전라좌·우도의 전선 74척, 협선 92척은 8월 24일 좌수영을 떠나 가덕도 근해에서 밤을 지냈다. 공격 전날은 밤을 새우며 원균·이억기와 작전회의를 하여 부산포공격에 따른 작전을 구상하였다.

9월 1일 오전 몰운대()를 지나 파도를 헤치고 다대포를 바라보며 절영도(: 지금 )에 이르렀을 때, 왜의 대선 수 척이 아군함대를 보고 도주하였다.

절영도에서는 수 척의 적선을 쳐부수고 척후선을 부산포에 보내어 적정을 탐지하게 한 결과, 왜선 약 500척이 선창 동쪽 산기슭 해안에 줄지어 정박해 있고 대선 4척이 초량() 쪽으로 나오고 있다는 보고였다.

적이 부산포를 요새화한 것을 알게 된 여러 장수들은 부산포로 깊이 들어가기를 꺼렸으나, 이순신은 이를 거부하고 독전기()를 높이 들고 진격을 재촉하였다. 우부장() 정운() 등이 선두에 서서 먼저 바다로 나오는 왜군의 대선 4척을 공격하여 불사르니, 뒤에 있던 여러 전선들도 함께 돌진하였다.

그러나 3진으로 나누어져 정박 중인 일본수군의 대·중·소선 470여 척은 아군의 위용에 눌려 나오지 못하고 있다가 아군이 돌진하며 맹공을 가하자, 배의 안과 성 안, 굴 속에 있던 왜군은 모두 산으로 올라가 아군에게 총통과 화전을 쏘았다. 아군은 이에 맞서 더욱 맹공을 가하며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선 100여 척을 격파하였다.

날이 어둡자 이순신은 육지로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전함을 돌리게 하였다. 이 싸움에서 적의 피해는 말할 수 없이 컸으며, 아군도 이 해전에서 30여 명의 사망자를 냈으며 특히 녹도만호(鹿) 정운이 전사하였다. 1593년 다시 부산과 웅천의 적 수군을 궤멸,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완전히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으로 삼고, 그 뒤 최초로 삼도수군통제사(使)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내원()하자, 죽도()로 진을 옮기고, 이어 장문포()에서 왜군을 격파, 적군의 후방을 교란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왜군의 전진을 막아 이들의 작전에 큰 차질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 뒤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후일에 대비하여 군사훈련, 군비확충, 피난민 생업의 보장, 산업장려 등에 힘썼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순신 [李舜臣]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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