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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순신4

by 박카스1 2018.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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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년 11월 19일 노량에서 퇴각하기 위하여 집결한 500척의 적선을 발견하고, 싸움을 기피하려는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을 설득하여 공격에 나섰다. 함대를 이끌고 물러가는 적선을 향하여 맹공을 가하였고, 이것을 감당할 수 없었던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와 선척을 잃었다.

그러나 선두()에 나서서 적군을 지휘하다가 애통하게도 적의 유탄에 맞았다. 죽는 순간까지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 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운명을 지켜보던 아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그대로 통곡하려 하였으나, 이문욱()이 곁에서 곡을 그치게 하고 옷으로 시신을 가려 보이지 않게 한 다음, 북을 치며 앞으로 나아가 싸울 것을 재촉하였다.

군사들은 통제사가 죽은 사실을 미처 모른 채 기운을 내어 분전하여 물러나는 왜군을 대파하였으며, 모두들 “죽은 이순신이 산 왜군을 물리쳤다.”며 외쳤다. 부음()이 전파되자 모든 백성들이 애통해 하였다.

이순신은 지극한 충성심, 숭고한 인격, 위대한 통솔력으로 보아, 임진왜란 중에 가장 뛰어난 무장으로 큰 공을 세워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족사에 독보적으로 길이 남을 인물이다.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도 이순신을 평하여 “유경천위지지재 보천욕일지공( )”이라 하여 높이 평가하였고, 이순신의 부음을 접하자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선조실록』에서 사관()은 이순신의 죽음에 대하여 “이순신의 단충()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쳤고, 의를 위하여 목숨을 끊었네. 비록 옛날의 양장()이라 한들 이에서 더할 수가 있겠는가. 애석하도다! 조정에서 사람을 쓰는 것이 그 마땅함을 모르고, 이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주를 다 펼치지 못하게 하였구나. 병신년·정유년 사이 통제사를 갈지 않았던들 어찌 한산도의 패몰()을 초래하여 양호지방(: ·)이 적의 소굴이 되었겠는가. 그 애석함을 한탄할 뿐이로다”라고 평하였다.

정인보()는 「이충무공순신기념비()」에서 “공()은 명장보다도 성자()이다. 신묘불측()이 오직 지성측달()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공은 성자이므로 명장이다.”라고 하였고, 천관우()는 『한국사의 재발견』에서 “충무공은 거의 완전무결한 인물이었다. 그러기에 성자라 하고 영웅이라 일컫는 것이다.”라 하였다.

이순신은 당대에는 죽음으로써 나라를 구하였고, 사후()에는 그 정신으로써 민족의 나아갈 길을 일깨워 주었다. 해전사연구가()이며 이순신을 연구한 발라드(G. A. Ballard) 제독은 이순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이순신 제독은 서양 사학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순신의 업적은 이순신으로 하여금 넉넉히 위대한 해군사령관 가운데서도 뛰어난 위치를 차지하게 하였다. 이순신은 전략적 상황을 널리 파악하고, 해군전술의 비상한 기술을 가지고 전쟁의 유일한 참정신인 불굴의 공격원칙에 의하여 항상 고무된 통솔정신을 겸비하고 있었다. 어떠한 전투에서도 이순신이 참가하기만 하면 승리는 항상 결정된 것과 같았다. 이순신의 물불을 가리지 않는 맹렬한 공격은 절대로 맹목적인 모험이 아니었다. 이순신은 싸움이 벌어지면 강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나, 승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신중을 기하는 점에 있어서는 넬슨(Nelson)과 공통된 점이 있었다.……중략……영국사람으로서는 넬슨과 어깨를 견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기란 항상 어렵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인정할 만한 인물이 있다면 이순신은 한번도 패배한 일이 없고 전투중에 전사한 이 위대한 동양의 해군사령관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것이다”라고 평하였다.

이순신이 전사한 데 대하여는 후대인들의 많은 의문을 자아내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리에 불과한 것이며 확실한 근거는 없다. 이순신은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시조(調) 등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진중()에서 읊은 시조들은 우국충정이 담긴 걸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이순신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는 관원을 보내 조상하고 우의정에 추증하였다. 1604년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되었으며, 좌의정에 추증, 1793년(정조 17)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어라산()에 있으며, 왕이 친히 지은 비문과 충신문()이 건립되었다. 충무의 충렬사(), 여수의 충민사(), 아산의 현충사() 등에 제향하였는데, 이 중에 현충사의 규모가 가장 크다.

현충사는 조선 숙종연간에 이 고장의 유생들이 이순신의 사당을 세울 것을 상소하여 1707년(숙종 33)에 사액(), 입사()되었다.

그 뒤 일제강점기 때에 동아일보사가 주관하여 전국민의 성금을 모아 현충사를 보수하였고, 제3공화국 때 대통령 박정희()의 특별지시에 의하여 현충사의 경역을 확대, 성역화하고, 새로이 전시관을 설치하여 종가에 보존되어 오던 『난중일기』와 이순신의 유품 등을 전시하였다. 그리고 이순신의 일생과 중요 해전을 그린 십경도()가 전시되어 있다.

시호는 충무()이다. 저서로는 『이충무공전서』가 전한다. 또, 이순신을 대상으로 삼은 작품으로는 신채호()의 「이순신전()」 등이 있으며, 「성웅 이순신」이라는 제목으로 영화가 제작되어 그의 행적과 공로를 일반에 널리 알리기도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순신 [李舜臣]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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