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임진왜란1

by 박카스1 2018. 11. 30.
반응형

정의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서 우리나라에 침입한 일본과의 싸움.

개설

1차 침입이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이라 부르며, 2차 침입이 정유년에 있었으므로 ‘정유재란’이라 한다.

하지만 임진왜란 하면 일반적으로 정유재란까지 포함시켜 말한다. 이 왜란을 일본에서는 ‘분로쿠[祿]·케이초[]의 역()’이라 하고, 중국에서는 ‘만력()의 역()’으로 부른다.

배경

조선이 임진왜란을 당하여 전쟁 초기 이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국력이 쇠약해진 것은 왜란이 일어난 선조대에 이르러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훨씬 이전부터 중쇠()의 기운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연산군 이후 명종대에 이르는 4대 사화()와 훈구()·사림() 세력간에 계속된 정쟁으로 인한 중앙 정계의 혼란, 사림 세력이 득세한 선조 즉위 이후 격화된 당쟁 등으로 정치의 정상적인 운영을 수행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군사적으로도 조선 초기에 설치된 국방 체제가 붕괴되어 외침에 대비하기 위한 방책으로 군국기무를 장악하는 비변사라는 합의 기관을 설치했으나, 이것 또한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이이()는 남왜북호()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하여 십만양병설()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가 재정의 허약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회는 점점 해이해지고 문약()에 빠져 근본적인 국가 방책이 확립되지 못한 실정이었다.

이러할 즈음 일본에서는 새로운 형세가 전개되고 있었다. 즉, 15세기 후반 서세동점(西)에 따라 일본에는 유럽 상인들이 들어와 신흥 상업 도시가 발전되어 종래의 봉건적인 지배 형태가 위협받기 시작하였다.

마침 이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혼란기를 수습하고 전국시대()를 통일, 봉건적인 지배권을 강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국내 통일에 성공한 도요토미는 오랜 기간의 싸움에서 얻은 제후()들의 강력한 무력을 해외로 방출시켜, 국내의 통일과 안전을 도모하고 신흥 세력을 억제하려는 대륙 침략의 망상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대마도주() 소[調]에게 명하여 조선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수호()하도록 시켰다. 그 의도는 조선과 동맹을 맺고 명나라를 치자는 데에 있었다.

이에 대마도주는 가신()인 다치바나() 등의 일행을 일본국 사신이라는 명목으로 부산포()에 보내어 통호()를 청하였다.

이 소식이 경상우수사의 치보()로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는 “찬탈시역()한 나라에서 보낸 사신을 받아들여 접대할 수 없으니 대의()로써 타일러 돌려보내라”는 뜻을 비치고, 2품 이상의 정신()들에게 가부를 논의하도록 하였다.

정신들의 결론은 관례대로 접대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선조는 내키지 않았으나 정의()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치바나 일행이 서울에 올라와서 바친 수교문에 오만무례한 구절이 있자 보서()만 받고 사신을 돌려보내지 않은 채 회답도 보류하고 있었다.

일본이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해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반대하는 여론이 빗발쳤다. 조헌()은 지부상소()를 올려 통신사를 일본에 보내지 말 것을 극언하기도 하였다.

그대로 해를 넘긴 조정에서는 이듬해인 1588년 문무반 2품직과 육조의 참의 이상을 중추부()에 모아놓고 가부를 재론하였다. 그 결과 “바닷길이 어두워 통신사를 보낼 수 없다”는 쪽으로 기울어져 다치바나 일행을 그대로 돌려보냈다.

이 와중에 소가 사망하고 양자 소[]가 그를 승계하여 새로 대마도주가 되었다. 그 역시 도요토미로부터 조선 국왕의 일본 입조()에 대한 독촉이 심해지자, 1589년 하카와시()의 세이주사() 주지인 겐소[]와 가신 야나가와[調] 및 고니시 유키나가[西]의 사신인 시마이[] 등과 일행이 되어 일본국왕사(使)라 칭하고 다시 부산포에 도착하였다.

선조는 구례()에 따라 이조정랑 이덕형()을 선위사로 삼아서 부산포에 보내어 접대하게 하였다. 소 등은 부산진 객관에 머무르면서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하며 함께 일본으로 가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 국왕의 일본 입조에 대해서는 조선의 노여움을 두려워한 나머지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통신사 파견 문제를 결정짓지 못한 채 소 일행은 일단 돌아갔다.

대마도로 돌아간 그들은 정사에 겐소, 부사에 소를 구성하여 다시 부산포에 왔다. 겐소를 정사로 삼은 것은 국왕사(使)로 위장하려는 것이었다.

이들을 다시 맞이한 조정에서는 이미 일본 사신으로부터 교섭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병화()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받았던 터라 통신사 파견의 여부를 논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한 정신들의 찬반이 엇갈려 결정을 짓지 못하던 중, 왕의 전교()에 따라 조선의 반민()으로 일본에 거주하는 자들이 가끔 왜구()의 앞잡이가 되어 변방을 소요시키니 그들을 잡아보내면 통신에 응하겠다는 것을 내세워 조선의 명분을 찾고 그들의 성의를 시험하고자 하였다.

이에 소는 선뜻 응하여, 야나가와를 자국으로 보내 사화동() 등 10여 인을 잡아와서 조선의 처치에 맡긴다 하여 이들을 모두 베어 죽였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통신사 파견을 결정짓지 못하다가, 마침내 보빙()을 겸한 통신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실정과 도요토미의 저의를 탐지하는 것으로 결론을 보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임진왜란 [壬辰倭亂]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반응형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진왜란3  (0) 2018.11.30
임진왜란2  (0) 2018.11.30
이순신4  (0) 2018.11.30
이순신3  (0) 2018.11.30
이순신2  (0) 2018.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