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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순신3

by 박카스1 2018.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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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명·일 사이의 강화회담이 결렬되자, 본국으로 건너갔던 왜군이 다시 침입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이순신은 적을 격멸할 기회가 다시 왔음을 기뻐하고 싸움에 만전을 기하였다. 그러나 원균의 모함과 왜군의 모략으로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고니시[西]의 부하이며 이중간첩인 요시라()라는 자가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가토[]가 어느날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이를 사로잡을 것을 은밀히 알려오자, 조정에서는 통제사 이순신에게 이를 실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순신은 이것이 적의 흉계인 줄 알면서도 부득이 출동하였으나, 가토는 이미 수일 전에 서생포(西)에 들어온 뒤였다. 이때 마침 조정에서도 영의정 유성룡을 몰아내려는 자들이 있었다. 이순신은 유성룡이 전라좌수사로 추천한 사람이라, 이를 구실로 먼저 모함당하게 되었다.

또, 그 중에서도 경상우수사 원균 같은 이는 한층 더 노골적인 불만을 가졌던 터라 이순신을 모함하는 소를 올리게 되었다. 상소를 받은 선조는 돌아가는 실정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여 원균의 상소만을 믿고 크게 노하여, 이순신이 명령을 어기고 출전을 지연하였다는 죄를 들어 벌을 주고 원균으로 하여금 그 직을 대신하게 하였다.

그러나 유성룡은 끝까지 “통제사의 적임자는 이순신밖에 없으며, 만일 한산도를 잃는 날이면 호남 지방 또한 지킬 수 없습니다.” 하고 간청하였지만 정세판단에 어두운 선조가 그것을 받아들일 리 없었기에, 이순신을 잡아들이라는 명령만을 내렸다.

이때 이순신은 전선을 거느리고 가덕도 앞바다에 있었는데, 이러한 소식을 듣고 바로 본영인 한산도로 돌아와 진중을 정리하고 원균에게 직위를 인계하였다. 당시 한산도에는 밖에 있는 군량미를 제외하고도 9,914석의 군량이 있었으며, 화약은 4,000근, 총통은 각 선척에 적재한 것을 제외하고도 300자루나 되었다.

이때, 영남 지방을 순시하던 도체찰사 이원익()은 이순신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왜군이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수군인데, 이순신을 바꾸고 원균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는 치계()를 올렸지만 허사였다.

이순신이 서울로 압송되자, 지나는 곳곳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백성들이 모여들어 통곡을 하며, “사또는 우리를 두고 어디로 가십니까. 이제 우리는 모두 죽었습니다” 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이순신은 이미 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였지만, 그러한 공로도 아랑곳없이 1차 신문() 때 한 달여 동안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남을 끌어들이거나 헐뜯는 말은 한마디도 없이 자초지종을 낱낱이 고하였다. 1차 신문으로 몸이 쇠약해지자 우의정 정탁()의 적극적인 변호로 인해 추가적인 신문을 받지 않게 되었으며, 도원수 권율()의 막하()로 들어가 두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다.

남해안으로 향하던 이순신은 중도에서 어머니의 부고를 받고, “세상천지에서 나 같은 일을 겪는 수도 있을까. 일찍이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한탄하면서 잠시 들러 성복()을 마친 다음 슬픔을 이기고 다시 남쪽으로 향하였다.

그 해 7월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적의 유인전술에 빠져 거제칠천량()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함으로써, 이순신이 힘써 길러온 무적함대는 그 형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한산도의 군비는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이순신은 초계()에서 이 소식을 듣고, “우리가 믿은 것은 오직 수군인데 그같이 되었으니 다시 희망을 걸 수 없게 되었구나.” 하며 통곡하였다.

원균의 패보가 조정에 이르자 조야()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고, 왕은 비국대신()들을 불러 의논하였으나 당황하여 바로 대답도 못하였다. 오직 병조판서 이항복()만이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기용할 것을 주장하였을 뿐이었다.

이리하여 조정을 기만하고 임금을 무시한 죄, 적을 토벌하지 않고 나라를 저버린 죄, 다른 사람의 공을 빼앗고 모함한 죄, 방자하여 꺼려함이 없는 죄 등의 많은 죄명을 뒤집어씌워 죽이려고까지 하였던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기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선조도 변명할 말이 궁하였던지 교서()에서 “지난번에 경의 관직을 빼앗고 죄를 주게 한 것은 또한 사람이 하는 일이라 잘 모르는 데서 나온 것이오, 그래서 오늘날 패전의 욕을 보게 된 것이니 그 무엇을 말할 수 있겠소.” 하며 얼버무렸다.

통제사에 재임용되어 남해 등지를 두루 살폈으나 남은 군사 120인에 병선 12척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조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전에서 적을 맞아 싸울 것을 결심하였다.

명량해전()에 앞서 장병에게 필승의 신념을 일깨운 다음, 8월 15일 13척(일설에 12척)의 전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부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은 재차 통제사로 부임한 뒤의 최초의 대첩이며 수군을 재기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싸움이었다.

명량대첩으로 제해권을 다시 찾고 보화도(: 목포의 )를 본거로 삼았다가, 다음해 2월에 고금도()로 영()을 옮긴 다음, 군사를 옮겨 진()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널리 둔전을 경작시키고 어염()도 판매하였다.

이로 인하여 장병들이 다시 모여들고 난민()들도 줄을 이어 돌아와서 수만 가를 이루게 되었으며, 군진()의 위용도 예전 한산도시절에 비하여 10배를 능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단시일에 제해권을 회복하고 수군을 재기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순신의 개인적 능력에 의한 것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순신 [李舜臣]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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