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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임진왜란2

by 박카스1 2018.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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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곧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모든 것이 이에 집중되어 사행을 선정하지 못하다가 11월 중순이 넘어서야 통신사 일행을 선정하였다. 즉 정사에 황윤길(), 부사에 김성일(), 서장관에 허성()으로 결정되었다.

통신사 일행은 이듬해인 1590년 3월에 겐소 일행과 함께 서울을 출발하여 대마도에서 한달간 머무르다가 7월 22일에 경도()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일행은 도요토미가 동북 지방을 경략중이어서 바로 만나지 못하고 11월에 가서야 접견하여 국서()를 전하게 되었다.

통신사 일행이 돌아오려 하는데도 도요토미는 답서를 주지 않아 국서를 전한 지 4일 만에 경도를 떠나 사카이[] 포구()에 와서 답서 오기를 기다리다가 보름 만에 받았다.

그런데 내용이 오만불손하여 김성일은 그대로 가져오지 못하고 여러 곳의 문자를 고쳐서 가져오게 되었다. 일행이 서울에 돌아온 것은 이듬해 3월이었으며, 이때 일본 사신 겐소·야나가와 등도 따라왔다.

통신사의 파견을 결정지을 때는 그 가부를 가지고 논박을 벌였으며, 사행이 돌아온 뒤에는 그 보고 내용을 놓고 다시 논란이 벌어졌다. 서인의 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을 준비하고 있어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며, 도요토미는 안광이 빛나고 담략이 있어 보인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반하여, 동인의 부사 김성일은 침입할 정형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도요토미는 사람됨이 서목()이라 두려워할 것이 없다 하였다.

이 때 서장관 허성은 동인이었으나 정사와 의견을 같이했고, 김성일을 수행했던 황진()도 분노를 참지 못하여 부사의 무망()을 책했다고 한다.

이들 상반된 보고를 접한 조관들 사이에는 정사의 말이 옳다는 사람도 있었고, 부사의 말이 맞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동서의 정쟁이 격화된지라 사실 여하를 묻지 않고 자당()의 사절을 비호하는 느낌마저 없지 않았다.

요행을 바라던 조정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결국은 김성일의 의견을 쫓아 각 도에 명하여 성을 쌓는 등 방비를 서두르던 것마저 중지시켰다.

또 선위사 오억령()은 조선에 머무르고 있던 겐소 등에게 “일본은 다음해에 조선의 길을 빌려 명나라를 정복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왕에게 일본의 발병()이 확실하다고 보고했다가 도리어 파직을 당하였다.

또 겐소 등이 그를 위문하는 황윤길과 김성일 등에게 “명나라가 일본의 입공()을 거절한 것을 도요토미가 분개하여 동병()을 꾀하고 있으니, 조선이 앞장서서 명나라에 알선하여 일본의 공로()를 열어줄 계획을 세우면 무사할 것”이라 했으나 이것도 거절하였다.

겐소 등이 답서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간 뒤, 소는 다시 부산포에 와서 배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도요토미가 병선을 정비하고 침략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조선은 이것을 명나라에 알려 청화통호()하는 것이 좋다”라고 거듭 변장()에게 말했으나, 10일이 지나도록 회답이 없자 그대로 돌아갔다.

그 뒤 왜관()에 머무르던 일본인마저 점차 본국으로 소환되고 왜관이 텅 비게 되자 일본의 침입이 있을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김수()를 경상감사, 이광()을 전라감사, 윤선각()을 충청감사로 삼아 무기를 정비하고 성지()를 수축하기 시작하였다.

한편으로는 신립()을 경기·황해도에, 이일()을 충청·전라도에 급파하여 병비 시설을 점검하게 하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고 백성의 원망만 높아져 갔다. 다만, 전라좌수사 이순신()만이 전비()를 갖추고 적의 침입에 대처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 동안 일본의 침략 계획은 무르익어 오랜 전쟁을 통하여 연마한 병법·무예·축성술·해운술을 정비하고, 특히 서양에서 전래된 신무기인 조총()을 대량 생산하면서 전쟁 준비에 전력하고 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임진왜란 [壬辰倭亂]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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