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조선이 주를 받들기 위해 연에 맞서 왕을 칭하고 연을 침공하려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이 기자의 후예를 자칭해 정통성을 얻으려 했다는 주장 등은 제한적으로 나온 바 있다.
기자가 이주해 온 것이 분명하다면 정황상 그가 다양한 신 문물을 가져왔어야 할 것인데,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 시대라 문화적인 부분은 그렇다 치더라도 유물 측면에서도 딱히 다른 문화의 급격한 유입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약점인 것이다.
기자에 대한 숭배 기록은 7세기 고구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에서는 태양신, 영성신, 가한신 등과 함께 섬겼는데, 정작 중국 측에서는 이를 음사(淫祀), '중국 중심의 관점에서 봤을 때 자신들의 기준에 들어맞지 않는 제사'로 보았다고 한다. 고려 시대에는 11세기 이후 기자에 대한 존숭 의식이 확립되었으며, 숙종 때에 숭인전(崇仁殿)이라는 이름의 기자 사당이 세워졌다고 전한다.
원체 기자에 대한 인식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정작 현대 한국인이 고조선의 시조로 여기는 단군과 관련해서는 고려 중기 기록 삼국사기 동천왕 21년 조에서 '선인(仙人) 왕검(王儉)'을 언급한 짧은 기록 외에는 전하는 바가 없으나, 고려 후기 삼국유사 이후 13세기 후반에 단군에 대한 인식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이후에도 유학자들에게는 기자가 큰 의미를 지녔기 때문에, 새로운 사상적 토대가 필요한 조선 건국까지는 단군에 대한 인식이 기자에 뒤쳐졌다.
단군을 인정하면서 한국의 기원을 요순시대로 끌어올리고, 기자를 인정하면서 중국에 비교해도 한국의 문화가 부족한 것이 없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가 숨어 있었다.
사림파 집권 이전까지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잘 드러나는데, 실제 원구단 폐지 논쟁 때만 하더라도 명나라는 원구단을 없앨 것을 요구했다. 오직 천자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조선에서는 조선이 동방에 있으므로 '동방청제(東方靑帝) 신위'만 받들자는 반칙적 제안도 있었고, 단군이 하늘에서 내려온 이래 천 년이 넘도록 하늘에 제사를 받들었으므로 조선이 명나라의 제후국이라고 해도 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의견도 있었을 정도였다.
조선의 예법을 살펴보면 천자국 예법과 제후국 예법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신라나 발해, 고려 때에 비해 천자국 예법의 용례가 줄어들고 외왕내제가 약화되긴 했지만 외왕내제적 성격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는데, 이들의 성리학은 조선 후기의 성리학과는 상당히 달랐고, 이는 정도전이 죽은 다음에는 더더욱 그랬다. 고려 시대에는 팔관회적 질서를 통해서 은근히 외왕내제를 이어갔고, 조선 역시 초기에는 어느 정도 이 영향을 받았다. 사림파가 정계에 진출하면서부터는 이런 성향이 약해지게 되는데, 단적으로 조광조는 소격서 폐지를 건의하면서 조선 왕이 명나라 천자처럼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조광조가 죽자 중종이 소격서를 복구시켰던 것처럼 조선 왕들이 기존의 전통을 방패 삼아 조선 초기의 흔적을 유지해 나갔다. 이것이 조선의 예법이 대외적으로는 물론이고, 대내적으로 오락가락하는 이유이다. 사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조선이 사대적이라는 비판을 듣는 것이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만일 비교 대상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자부심과 자존감이 강했던 고려가 된다면 말이다.
수천 년 전부터 조선이 당당한 중화 문화권이었다는 사실이 실증되었으니 당대인으로서는 매우 자랑스러운 발견이었을 터이다.